
글쓴이 : 강대의 (118.40.89.20)
두 번 찾아 본 우리 민족의 명산 백두산이여!!
2년전!!
2011년 07월 02일에 이미 7박 8일로 순수 민간통일운동단체 임원 11명이 感動的으로 다녀온 백두산여행인지라 이번 백두산관광 일정들을 보면서는 크게 흥분이 밀려오지 않았고 오붓하게 둘이서 海外旅行을 다녀오는 느낌!, 그냥 그런 느낌의 出發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굳이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오롯이 둘이서 각자 다른 전문직종의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통과 평통에서 직, 간접적인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터라 우리 민족의 명산!! 백두산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번 여행길이 어쩌면 宿命的으로 우리에게는 통일을 기원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민족의 宿願인 통일을 원하는 여행으로도 자리매김 되어져 一石二鳥의 效果를 가져올 거라는 생각으로 마냥 즐기기로만 作定했다.
그러나 체 여행 3일이 못 되어 우리는 肅然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맑고 고우며 파랗다 못해 시퍼런 백두산 천지를 大明天地에 아주 찬란하게 넋을 잃고 바라보고서는 두 단체의 임원으로서 統一運動을 한다는 名分이 뒷받침되어 여느 관광객들과는 이번 여행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며 紀行文을 讀者의 눈만 따라와 주기 바란다.
2013년 7월 27일 아침 6시 30분!!
어제 저녁 미리 인천 연안부두근처의 모텔에 들어서 아침을 맞이한지라 참으로 하루의 시작이 참으로 충만하고 福되다. 항상 좋아하는 백회혈(百會穴)
자리에 쑥뜸을 하며 여느 때보다 아침을 찬란하게 맞이하다.
우리는 차분하게 인근 롯데마트에서 더 필요한 준비물을 추가로 더 갖추고 100여만원을 환전하여 10시 40분에 연안부두 1층 프론트로 여행사와의 약속된 집결지에 도착하였다.
이미 35명의 일행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나와 있었다.
11시 승선 후 이내 배는
출발하였고 선상에서 첫 오찬으로 생생한 1식 4찬의 국내식과 중국식이 혼합되어진 오찬을 흡족하니 즐길 수 있었다.
선실의 방배치는 4인실로 항상 문제다. 夫婦가 함께 가는데도 불구하고 4인실에 짐짝 집어넣듯 해 썩 유쾌하지 못하였다. 비록 옆방에서 다른 팀원들과 함께 간다하지만 불편하기 이를 때가 없다. 침실의 불만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우리는 선상으로 나와 바다를 구경하며 사진 찍기에 바빴고 준비해온 소주와 맥주에 일행들과 취하다.
넓디 넓은 서해바다 내음새에 더 취해 빠져든다!!
7월 28일
아주 순조로운 뱃길은 東海와는 사뭇 달리 西海의 여러 섬들과 지형에 막혀서 파도가 높지 않고 잔잔해 평온한 여행길을 예고하기도 했다.
4인실의 불편함으로 일찍 눈이 떠지고 부두에 다다르기 2시간여부터 육지가 보이더니 14시에 중국 영구항에 정착하여 下船한다.
우리 일행을 반기는 중국 現地 가이드안내로 45인승버스로 오르는데 좋은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데 일행들 사이에서 신경전이 펼쳐진다. 버스가 출발하여 2년 전에 없던 도로가 확 뚫려 4차선 고속도로로 예전보다 2시간여를 앞 당겨진다. 4시간여를 달려 저녁 무렵 가랑비가 내리는 단동에 도착하여 차창으로 그리고 멀리 보이는 압록강과 위하도를 走馬看山식으로 바라보며 좋은 旅程을 旣約해 본다.
미군의 폭격기로 끊어진 철로를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感懷에 젖어 보기도 한다. 이 끊어진 철교를 보면서 중국당국의 변명이 들리듯 모든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서술된다는 것. 다만 아쉬움은 차창으로 본다는 것인데 이미 2년전에 자세히 본 적이 있어 짐짓 나만은 만족한 체 지나가 한 호젓한 식당에 도착하여 여유 있는 첫 중국식 晩餐을 즐긴다.
중국식과 한국식의 섞어진 飮食文化가 다소 생소했지만 감동을 주는 건 아마 주린 배를 채워 음식이 內臟을 향해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떻게 알고 리어카행상과 과일상이 도착해 있고 와이프는 그걸 사려고 일행들과 기웃거리는 걸 막아선다.
“좀 있다가 호텔근처에 가면 엄청 싸!!”
다시 버스에 올라 통화시로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 조선족휴게소를 중간에 들린다. 이 것 부터가 중국여행에서는 현지가이드의 장난이 어쩌면 始作되는 것이다. 장뇌삼한뿌리 30원짜리를 할인을 요구해 20원(한화 4,000원)구입해 즉석에서 씹어 먹고 나름 힘을 측정해 보기도 한다. 중국여행은 이미 이렇게 3시간 30분여 기사가 길을 헤매고 갈팡질팡하면서 겨우 찾아 들어갔는데 알고보니 2년 전의 그 호텔이다.
통화시 통가강 호텔 도착!
늦은 밤 23시가 넘어 어렵게 도착하였던 것이다.
바깥구경은 생각도 못한 채 준비해 온 술을 룸에서 마시고 인터넷이 안 되어 준비해 간 노트북은 無用之物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그냥 샤워 후 잠을 청하다.
7월 29일
중국에서 여행 중 첫 아침을 나름대로 상큼하게 맞이할 틈도 없이 숨 막히게 현지가이드의 독촉으로 눈뜨자마자 6시반 무렵에 조식을 허겁지겁 마치고 차에 오른다.
백두산 북파로 5시간 이동하던 중 가이더가 35명의 일행들에게 천지 구경 후에 발마사지를 종용한다. 1인당 350위엔으로 90분짜리란다. 가이드의 설득력 없는 말이 더 불안했지만 일행 중에서 3~4명 빼고는 발마사지를 하지 않겠다고 해 가이더와 불편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45인승버스는 북파 중턱에서 주차장에 주차하고 다시 25인승차로 1차 바꿔 타고 천지가까이 오른다. 지금부터는 급경사길로 다시 9인승차로 불안하게 2차 이동 후 천지꼭대기로 바짝 다가서듯 꼬불꼬불한 길을 돌고 돌아 오르기 시작하여 천지 코앞에 바로 하차한다. 우리 일행들은 30여m 천지 북파 길을 좌 또는 우로 걸어서 오른다.
이처럼 가장 화창한 날씨에 오르게 되는 날짜를 모두 합쳐도 백두산의 氣象觀測상 많아봐야 1년에 20일 程度란다. 특히 7월의 날씨에는 더욱 더 기대할 수 없고 8월말에서 9월에나 가능한 화창한 날씨라는 말에 더더욱 天池에 반하다!!
중국여행에서 恒常 기본은 2~4시간 버스로 이동을 한다는 것.
그 것도 만만디(牛步)가 보여주듯 왕복 8차선에서도 운전기사는 90㎞이상을 결코 넘지 않는다.
참으로 나도 모르게 역사를 돌이켜보며 얼굴이 상기된다.
엄청나게 셔터를 누르며 사진을 마구 촬영한다. 사진 촬영은 와이프가 더 좋아라 한다. 정말 놀랍다!! 한 눈에 잡힐 듯한 천지는 파랗다 못해 시퍼렇고 우리는 이러한 천지의 시퍼런 물을 보며 한없이 반하고 마냥 빠져든다. 이 모든 광경을 내 준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조상님께 감사드린다. 천지를 안고 있는 모든 신령님께 거듭거듭 감사드린다.
우리는 사진을 둘만이 촬영하기도 하고 때론 獨寫眞을 갖은 포즈를 취하며 서기도 했다. 연신 사진촬영에 몰두하고 건너편에 멀리 보이는 남파와 서파를 찾아 그쪽에 오른 관광객들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동파의 북한군이 거주하는 천막과 幕舍모습과 서파 끝에서 警備를 맡고 있는 북한군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보며 그들의 행동이 보이는 대로 즐거워했다.
일행이 많지 않으니 좋고 호젓하게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단 둘이어서 여행의 편안함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서 무척이나 좋았다. 항상 단체를 동행하여 여행하다 보면 와이프가 신경 쓰이고 돌출행동에 따른 주변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는 입장이라서 항상 피해의식이 있었으나 오늘만큼은 전혀 그러하지 않아 아주 편하고 좋았다. 천지의 북파의 길이는 1km쯤의 관광노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신령님들의 도움으로 좋은 기운을 한 몸에 한껏 받고서 봉고로 내려오는 것은 순식간이더구나!!
우리는 25인승 순환버스로 다시 이동해 68m의 거대한 물줄기의 천지폭포에 다다른다. 역시 천지폭포의 비경에 놀라 다담아 가려고 연신 셔터를 누루고 갖은 포즈로 주위를 歎服스럽게 한다.
천지 온천물에 삶아진 계란을 3개에 2,000원을 주고 시식을 해 본다. 껍질이 잘 안 까져서 천지의 氷河물에 잠시 씻어 다시 까보기도 하고 맥주에 온천물 계란은 별미를 의식해 보려 해도 별로 느낌은 없다. 그냥 계란으로 계란 흰자위나 노른자위 모두가 반숙인데 무색무취로 무미했다.
다만
주변의 행상에게서 장뇌삼을 흥정하여 5개를 먼저 10위웬에 구입하고 4뿌리를 다시 4위웬에 절묘하게 구입하여 주변의 뛰어난 상술에 걸맞게 흥정의 달인으로 부러움을 샀다. 우리가 늦게 차량에 도착해 빈축을 샀으나 원래 4시 약속에 갑자기 가이더가 3시50분으로 시간을 급조정하여 잠시 혼란이 있었고 30여분 내려가 만찬을 하였으며 별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중국음식은 비비면 거의 음식이 맛있게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닭는 계기가 되기도 한 만찬이었다.
이윽고 다시 차에 올라 40여분 후 이도백화조선호텔에 7시무렵 도착했다. 여유로웠다. 뭣부터 할 것인가를 의논하며 창밖을 보는데 이미 길거리상인으로 호텔앞이 가득하다.
둘이 보듬고 침대에 머물다가 이도백화를 구경하기로 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은 택시기사와 손짓과 표정으로 말하며 아까 눈여겨 봐 놨던 한 지역에서 5위웬을 주고 내렸다.
한 메이커상점으로 들어갔는데 여사장이 우리말을 알아듣는다. 말을 걸어보니 조선족여성이었다. 반가움에 여러 부분의 도움을 받아 맛있는 꼬치구이술집과 발마사지업소를 確認한다. 우리가 찾은 꼬치구이집은 이도백화지역에서 가장 알아주는 술집이었다.
종업원이 무려 6~7명에 이르고 주변 꼬치구이집은 손님이 별로 인데 이 집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건너 술집의 조선인으로부터 개고기, 갈비를 60위엔에 맛있게 먹고 장뇌삼도 값싸게 5뿌리를 구입했다.
이어 다시 그 점포로 와 발마사지집을 소개받고 두사람 300위엔에 직접 업소까지 案內를 받고 호텔까지 택시로 직접 배웅까지 받는다.
7월 30일
백두산을 뒤로 하고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용정으로 3시간여 버스로 출발한다, 가이더가 용정지역에 들어서 일송정이 있는 산을 보여 주길래 준비한 망원경으로 일송정자와 소나무를 확인했다. 이어 혜란강을 건너서 윤동주시인이 다녔던 곳으로 유명한 용정시내의 대성학교에 도착한다. 학교내의 해설사의 소개로 모든 역사를 확인하고 방명록에 기록하고 50위엔을 무기명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공허한 마음을 추스러서 이번에는 조선족 自治區 연변시로 향한다. 2시간 여 만에 도착해 도시혼잡으로 인해 버스를 주정차하기가 힘들어 서시장을 30여 분만에 조촐히 쇼핑하고 곧장 버스에 오른다. 이번에는 두만강국경지역인 도문시에 도착했는데 가랑비가 와 우비를 입은 체 내려 강 건너 북한 남양시 땅을 망원경으로 관망해 본다. 연일 중국에 내린 장마비로 강물은 넘실대 유람선은 아예 타지도 못하고 유람선선착장이 불어난 강물로 넘실대는 건만 바라보다가 연신 사진만 찍고 만다.
다만 저편 북한의 선전마을과 몇몇의 북한주민의 발걸음을 보고 선전용 플랑카드에 ‘김정은 동지...’어쩌고 저쩌고 가 적힌 내용을 보며 北韓住民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望遠鏡으로 더 다가서 본다.
이곳도 2011년에 압록강 너머 바라 보왔던 산하와 다를 게 없고 주민들의 산 개간으로 민둥산이 되어 가고 있는 북녘산하를 안타깝게만 바라본다.
이어 길림성의 수도인 장춘으로 5시간20분여 출발하여 간다. 어릴 적 수학여행을 가자면 강릉경포대로 충북 말띠고개를 넘어 속리산의 긴 旅程을 생각해 봤으나 그건 세발의 피다.
참으로 많은 시간의 이동이다. 지금까지 1,000여km의 길을 달려 왔을 게다. 우리나라가 삼천리 錦繡江山이라는데 동북삼성을 넘나들며 2,500여리를 달려 왔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일이면 삼천리가 훨씬 넘을 거다. 장시간 버스이동에 와이프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그 화풀이의 대상이 내가된다. 끝없이 어둠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중간휴게소에 여행객들을 위한 거대한 휴게식당이 어마어마하게 큰게 아니다!!
즐비하게 널려져 있다. 활어란 말에 생선회? 를 생각해 봤지만 잉어를 살아있는 채 고아 찜으로 나와 그게 활어라는 것이다. 10시반 에나 저녁을 먹고 12시 다 되어 호텔에 도착하다.
7월 31일
모처럼6시에서 7시기상이란 말에 어제저녁부터 기뻤다, 오늘은 요동벌을 달려서 심양(만주 봉천)으로 3시간반 이동해 간다. 와이프가 장뇌삼을 먹어보라는 인사말도 없이 혼자 우적우적 먹는다고 시비를 걸어와 말다툼을 하다. 요녕성박물관을 관람할 때까지 아무 말도 걸지 않고 있다.
이번에는 조금 떨어진 서탑 지역에 조선족, 북한 동포들이 거주한다는 서탑시장 탐방을 시작하였다. 맥도날드 커피숍으로 와이프가 급 화해를 해 와 냉커피(5위엔)와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국내가이드와 현지 가이드가 들어서 어쩔수 없이 커피대접을 하다.
이어 동북 4대 명산인 천산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2년전 중국마지막황태자가 목욕을 자주했다는 꽤 큰 온천탕을 생각했지만 마을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온천의 온천욕이다. 이후 근처 주점 또는 浜館에 딸려 있는 식당에서 저녁만찬을 하구서 손수레로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과 흥정하다가 캐논카메라 렌즈를 분실하다. 엄청 신경이 쓰인다. 바삐 안산시내로 1시간 반정도 들어와 호텔에 투숙하다.
와이프랑 밤늦게 잠들기가 아까워 주변을 둘러보다가 음악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가다가 대형광장에 포장마차를 발견하다. 여주인의 ‘도라지타령’이 민족의 힘을 느끼게 하다. 맥주와 준비한 소주, 그 것도 패트병 2개를 가져왔는데 날이면 날마다 술이라 거의 떨어져 간다. 소맥을 먹는 우리를 보고 놀란다. 젊은 20대 여성들은 맥주병을 맞대고 흡사 우리나라 카프리맥주 마시듯 병끼리 부딪히며 건배를 하며 병째 마신다.
8월 1일
오늘은 5시기상을 약속해 아침도 거른 체 6시에 준비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심양시내의 이른 아침의 도로정체로 2시간여 걸려 영구항에 도착하다. 시간 여유로 중국라면을 먹기 위해 터미널에 짐을 나두고 항구거리로 나온다.
어느 허술한 중국식당에서 북한에서 초등학교 시절 도망 나온 사람과 영구항 지역깡패두목과 술 한 잔을 하게 되다. ‘한국 안산에 지금 살고 있구요, 한국보다는 이곳이 우리는 살기가 아주 편해요. 韓國은 돈이 없으면 정말 살기가 어려워요.’
‘이 곳에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되면 꿈이 없지 않은가?’라는 말에
‘왜요!! 꿈과 희망이 있지요. 오늘 처음만나 꿈을 말하기에는 뭐합니다!!’
술 한병을 사주고 다음에 만나기를 기약하고 부산스럽게 나서다.
중국 사람들의 여유 또는 긴 기다림후 10시 무렵 자국민을 우선 들여보내고 30분후에야 출국수속을 시작하였다.
출국수속을 모두 마치고 폐차지경의 차 1대로 30분이상 항구에서 또 기다려 향설란에 오른다. 중국에서 6일간 겨우 30여 만 원을 사용한 결산을 맞춰보다.
귀국하는 안도감에 칭다오 맥주폭탄에 빠져 들다. 중국 올 때 많은 여행객들로 빈방이 없었지만 입국할 때는 여행객들이 별로 없어 투윈룸을 100위엔 더 주는 조건으로 잡았는데 와이프가 한사코 반대하여 함께 4인실에 있다가 잠들어 방 배정으로 다른 일행과 엄청나게 다툼이 일어나다. 조선족할머니 70대의 도움으로 싸움이 진정되고 4인실을 우리와 할머니가 사용하게 되다.
저녁, 그리고 아침, 점심까지 우리 티켓으로 함께 식사 제공해 드리다.
8월 2일
6시반에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조선족할머니와 조식후에 여유로움으로 배 관광을 즐기고 지금까지 사진촬영장수를 카메라를 통해보니 500컷이 넘어가고 우리 인생에서 이렇게 많은 사진 찍기에 나선 것도 처음이고 해 경이로움을 갖고 모처럼 컴퓨터정리를 방바닥에 배 깔고 하다. 이윽고 오찬후에 짐정리를 하구서 3시반 연안부두에 도착하다.
한참동안 주차한 곳을 몰라 헤메다가 겨우 찾아서 태안반도 쪽 민통팬션으로 향하다. 빨강팬션 도착후 사진 촬영하고 이은주처장과 담소를 나누다. 태안반도회집근처의 어시장에서 1kg 회를 떠서 인근식당에서 실컷 먹다.
홍성군으로 알았는데 모텔에서 나와 보니 홍주시청근처이다.
보리밥집에서 아점, 오찬을 먹고 소고기로 유명한 광시면을 들려 우족과 사태쪽을 사 아이스박스에 넣고 백제의 고성인 부여를 향해간다.
부소산성의 시작인 매표소를 벗어나 인근 나루터에서 고란사 쪽의 나룻배를 타고 낙하암 3천궁녀의 전설을 뒤로하고 고란사의 약수를 마시고 부소산성을 오른다.
와이프는 아까부터 위통으로 식은땀을 삐죽이 흐르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소화제를 먹고 안 되니 진통제를 먹고서 연리지를 보고 태자들이 걸었다는 태자 숲으로 해 정문으로 나오는데 소낙비가 내리려고 한다. 바삐 차에 올라 광주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 休暇로 무려 7박 8일을 마치고 나니 우리사이가 더 돈독해 지고 새로움이 배어난다.
600여장이 훨씬 넘는 사진으로 우리의 熱情이 남아 있고 우리의 旅程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천지의 새로운 큰 기운이 우리 가슴속으로 들어와 뭔가 큰 복과 크나 큰 사랑의 힘으로 큰 자리를 금방 또아리 틀 것 같은 기운이 있다.
“神이시여!!
모든 準備가 다 되어 있으니 지금 所任을 굳이 뿌리치지 않겠습니다!!“
항상 감사하고 감사한 神聖스런 精氣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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