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은 강항선생 기념사업회 :::
 
작성일 : 13-03-21 06:56
강대의이데이뉴스사대표회장, 대마도기행문
 글쓴이 : 강의나라
 

이데이뉴스사(대표회장 강대의0와 한중문화교류중앙회(회장 강원구)에서는 우리나라의 옛 땅이며, 우리문화와 일본문화가 버무러져 있는 대마도를 지난 17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역사문화탐방을 마쳤다.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 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섬으로 날씨가 좋으면 부산에서 육안으로도 선명히 볼 수 있는 섬. 그곳이 바로 우리와 가까운 쓰시마 섬(對磨島)이 버려진채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인, 대마인, 일본인의 성격
우리 일행은 부산항에 도착하여 가이드의 안내로 09:50에 쾌속선에 승선하여 대마도(히타카츠)도착해 입국수속을 마치자 마자 이른 중식(우동+스시 정식)을 접하고 곧바로 러/일전쟁 추모 우호비가 있는 도노자키 전망공원으로 향했다.
이 곳의 푸모비와 우호비를 바라보며 소름끼치게 느낀 점은 대마도사람을 ‘왜구’라 칭하게 하며 정작 본토에 있는 일본인들은 더 간악하고 저주스러운 짓을 저지른 것을 보면서 이 나라사람들의 이중성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먼저 러일전쟁추모비에 1300여명의 러시아군인들의 이름이 빼곡이 그것도 일본 군인들의 전사자까지 적혀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신사문화이구나라는 생각에 이들은 죽어서 까지 적과 적이 하나로 생각해 생선엮듯 엮어가는 것 같아 아이러니했다.

이번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처참이 무너진 러시아 발탁함대의 로제스트벤스키제독이 부상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자 일본의 해군대장 도고 헤이하지로[東鄕平八郞]가 병상에 찾아간 장면을 우호비라는 제목으로 세워 논 것을 보면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해군대장 도고 헤이하지로[東鄕平八郞]와 일행들은 부상당한 로제스트벤스키제독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다른 일행은 일본인이 추앙하는 도고 헤이하지로[東鄕平八郞]를 정자세로 응시하고 있는 그런 장면이었다.

이것을 우호비라고 말한다는 게 외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서도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이 우호비가 태생된 러일전쟁의 절정은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발틱함대와 일본해군이 대한해협에서 벌인 전투라 말할 수 있겠다.
이들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남단의 거제도에도 1935년 기단위에 높이 약 8m의 뾰족한 모양으로 출정을 앞두고 결의를 다진 일본 해군대장 도고 헤이하지로[東鄕平八郞]의 글까지 새겨놨으나 우리는 1945년 광복이 되자마자 폭약으로 폭파시켜 없애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땅에 이 우호비를 자랑스럽게 세워 놓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대마도는 진정한 우리 땅!!
 ‘과연 인간의 잔혹성의 한계란 어디까지 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어느덧 일본 100경 중 하나인 미우다 해수욕장에 내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고 고운모래와 주변의 환경은 자연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여전히 이곳이 낯설지 않으며 결코 외국 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소위말해서 ‘읍내에 사는 동창 녀석들이 철없이 면 또는 산이나 섬에서 몇 십리씩 걸어 통학하는 동창들을 업신여기고 낮게 보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른이 되어서도 물아래 산다고 해 찌질하게 보고 한 것처럼 유사 이래 엄연히 우리 땅임에도 불구하고 침략질이나 도둑질을 한다고 대마도라는 섬사람들을 버리다시피하여 요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하염없이 가이엾고 동정이 가는 그런 땅이었다.
날씨가 흐려 보지는 못했지만 맑은 날 부산이 보이는 한국전망대에 올라 50Km도 안 되는 지척의 우리나라를 보며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었다.

발아래에 있는 조선통신사의 순국기념비...
1703년 조선의 역관사(통신사) 일행이 타고 가던 배가 와니우라 앞바다에서 좌초되어 승선했던 108명 전원이 사망했던 사고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선국 역관사 조난비!!
선진문화국의 사절로서 300~500명 규모로 구성된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선조 34년(1601)에 손문혹, 사명대사(유정) 등이 파견되어 일본의 동정을 살핀 바 있다. 그 뒤 선조 40년(1607)부터 순조 11년(1811)까지 12회의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사는 국빈으로 대접을 받았고, 일행에는 문인과 서화가 등이 동행했으며 일본의 지식인들은 회담을 통해 조선의 선진문화는 물론 역사, 경사(經史), 풍물, 화풍 등을 얻는 것이 그들의 영광이라 여겼다. 따라서 조선통신사의 파견은 우리 민족의 문화우월성을 확인시켜 준 것이며, <통신사행렬도>가 이를 나타내 주고 있다.


좋은 안내자를 만나 대마도의 진실을 접하다.
그런데 참으로 여행이란 가이드의 역할이 90%이상을 좌우한다.
이번 가이드는 박학다식하여 모르는 역사가 없을 정도였다.
공기 좋고 참나무와 삼나무가 풍성한 산자락부분에 내려 신사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바다의 신을 모시는 신사. 가장 오래된 와타즈미 신사에 대한 설명은 압권이었다.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이곳 대마도를 기점으로 해 일본을 실질적인 지배를 하였다는 역사는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일본왕이 백제의 후손이라 하여 총리를 비롯한 대신들의 잘못된 역사관을 꾸짓고 일본인들의 가슴속에는 백제인들의 정신과 혼이 남아 있다는 진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백제의 땅을 되찾기 위해 일제침략의 잘못이 오용되었으며 잘못된 역사관으로 우리나라를 배척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기주의식의 판단과 생각이란 정말 무서운 왜곡된 역사를 잉태시킬 수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이들은 이미 100여년전에 러일 전쟁에서 일본 승리로 이끌기 위한 만관교와 만제키 운하를 무모하게 만들었으며 그 운하를 바로 아래에 두고 시간에 쫒겨 저 멀리서 관망을 하면서도 이들의 치밀함에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이윽고 번화가가 눈에 들어오고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에 우리나라역사가 곳곳에 숨어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대마도에서 죽어나간 일본인들의 저주인지 떨어뜨려 형체가 말이 아니다.
순간의 생각이 이정도로 드는 건 우리 민족이라면 꼭 대마도를 가봐야만 알 것이리라!!

알찬 여행이란 이런 것
‘알찬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표본으로 시간의 공백과 허비성 없이 어느덧 숙소로 이동하여 도착했다. 오기전에 차안에서 가이더의 설명은 모든 것이 갖춰진 유명호텔은 잊고 기대를 하지 말라는 냉소적인 설명에 기대를 내려놨지만 소인국의 분위기를 일치감치 예견했기에 대마도 일본식 전통호텔은 다다미에 깔린 이부자리와 일회용품, 겨우 한사람의 공간인 화장실 겸 욕조를 보며 이네들의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의 실천화가 확 들어왔다.
석식(해산물 BBQ 또는 현지식)만찬을 육, 해, 공의 고기가 어우러져 맛갈스러웠으며 4홉들이 소주와 생맥주에 취기가 올라왔다. 여유로운 분위기에 음식문화차이가 확연히 들어났으나 염치불구하고 계속 김치를 요구하는 일행에게 예전에 가이더를 했던 여주인의 짜증은 조금은 거슬려 만원짜리 2장으로 달래고 나와 하루의 자유시간을 만끽하였다. 1층에 있는 공중목욕탕에서 온천욕도 즐겨보며 하루를 정리하는 망중한에 조금은 아쉬운 게 회를 마음껏 먹어보지 못함이었다.

가마귀 소리, 음산한 밤자리
18일!!
늦잠을 잤나보다. 일행이 시간이 다급해 깨워 일어났다. 이 지역이 왜침과 노략질 또는 습격으로 인해 많은 선인들이 죽어서 혼령들이 떠돌아다녀서인지 잠꼬대와 가위눌림까지 생겨났다. 새벽녘에 불어대는 비바람소리에도 무척 신경쓰였고 그네들은 아무리 길조라 하며 우기더라도 가마귀 소리에도 충분히 음산한 밤자리였다.

  전통호텔에서 일본식과 한국식으로 차려진 조식 후 1인당 6천원의 부담으로 2박 3일의 여행효과를 가져오도록 가이더의 배려가 뭍어났다.

여행 이틀로 3일 일정에 들어
비가 주룩주룩내려 시내 관광을 포기하고 버스로 더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이 부분이 대마도 2박 3일일정에 들어간 부분이라는 것이다.
대마도는 말머리가 우리나라를 향해 있는 형국이고 크게 산대마 하대마로 나눈다.
드디어 대마도의 최남단 쯔쯔자키에 위치한 전망대인 쯔쯔자끼 전망대에 도착한다.
일본왕의 각지역에서 궁녀차출로 인해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딸은 걱정이 깊어 끝내 물에 빠져 죽어 그녀를 기리기 위해 이 지역 명을 사용한다고 했다.
어떤 이는 농담조로 던진다.‘그녀의 행동은 철부지이다. 왕이 부르면 냉큼 달려가 궁녀로서 후궁도 되고 첩 또는 왕비로 신분상승을 꿈꿔 한 시대를 풍미해도 좋을 것을 왜 죽자고 했느냐’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왕비가 정권을 휘어잡고 나라와 역사를 바꾼 여인네가 어디 한 두 명이었느냐?’는 것이다.
오며가며 산세도 훑어보고 제법 높은 500미터정상 가까운 느낌도 받으며 시내에 도착해 쇼핑을 여유롭게 한다.
어느 나라든 그 국가의 빼어난 약이나 식품 등이 있다. 이번 여행은 여성들이 2/3가 넘어 팀분위기가 모두 일본관광공사 면세점쇼핑에 열을 올린다.
일정시간의 쇼핑을 마치고 소위말해서 밴또(일본식 정식)를 점심으로 음식점에 들어가 먹는다. 이것도 희안한 문화라 생각되었다. 미리 차려진 밴또에 밥 몇 숟갈 뜨고 나니 식사시간이 끝난다. 그러나 별 이의 없이 일어나 시내여행에 나서 일본식 주택모양과 사는 모습, 일본성씨의 유래를 들으며 그 유명한 일본인의 자존심 나카라이토스이의 생가에 도착한다.

지한파 소설가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
지한파(知韓派)였던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는 우리와 인연이 깊은 소설가로 1882년 춘향전을 번역해 아사이신문에 20회 연재하기도 했다.
일본의 5,000엔 신권의 주인공인 일본의 여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木通口一葉)를 안다면 그녀의 유일한 연인이었던 나카라이 토스이에 대해서도 들어 봤을 것이다. 현재는 나카라이 토스이와 히구치 이치요에 대한 자료가 소장된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수선사 정문에서
수선사!! 규모가 아주 작은 절이다
이곳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일본에 잡혀가 그곳에서 순국하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수선사는 일본의 다른 신사와는 달리 불교사찰로 백제의 비구니였던 법묘스님이 창건한 사찰인 슈젠지라고 전해져 온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74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06년 의병을 일으켜 항일 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로 유배되어 감금되었고,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하기로 결심하고, 단발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단식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순국했다.
선생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갈 때 일본 땅은 밟기 싫다며 신발창 밑에  고국의 흙을 깔고 갔다고 전해진다.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를  수신사에 세웠다

조선과 인연을 맺다?
조선통신사비를 보러 가는 길목에는 쓰시마 최후의 도주였던 소우다께유끼(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했던 비운의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의 결혼기념비’도 남아있어 가슴 한 켠이 뭉클해 온다.
덕혜옹주는 고종(高宗)과 후궁인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에 얻게된 딸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자라던 13세의 어린나이에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활하게 된다.
1931년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해 딸 정혜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된다.
남편 소다케유키는 이를 꺼려해서 덕혜옹주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지 않고 집안에 감금상태로 두었고, 옹주가 자꾸 집밖을 나가려고 하자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고 전해진다.
1962년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으며 힘없는 나라의 황녀로 태어나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서 교육받게 되고 정략결혼에 이르러 심한 향수병과 스트레스로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78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쳤다 .

‘환단고기’를 접하며 대마도를 마치다.
여행중 ‘환단고기’를 읽으며 접하는 대마도여행은 잊을 수 없는 감동 깊은 여행이었고 기행이었다.
이제는 자주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즈하라항 도착해 출국수속을 밟으며 뭔가 하나를 놓고 가는 기분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쾌속선은 출발한지 2어시간만에 험난한 파도를 뚫고 부산항에 여행객들을 도착시킨다. 배에 승선하여 오가며 느낀 여행은 인터넷예약에 빼곡이 매꿔져 매진으로 대마도예약이 어려운 상황과는 달리 1/3이 차지 못한 상태에서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간만에 좋은 여행에 좋은 가이더에 참으로 행복한 이틀이었다. 부산항에 준비된 대형버스에 몸을 싣고 출발하여 김치두부찌게에 소주한잔으로 맛들어지게 내장을 흡족히 적시고 광주에 무탈하게 도착하여 아쉬운 작별에 굳은 악수만 나누었다.